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야 문명 (문단 편집) === 과거의 학설 === 두 번째, 곧 후기 마야의 쇠퇴 원인은 위의 스페인 선교사의 [[반달리즘]]으로 인해서 상세하게 알기가 힘들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과도한 개발로 인한 토양침식, 즉 환경파괴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출토된 동시대 [[유물]]에서 치명적인 영양실조의 흔적이 보였고, 주요 생산품인 [[옥수수]]가 자랄 수 없을 정도로 토양은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애초에 옥수수 자체가 지력 소모가 심한 작물이었으므로[* 반면, 북아메리카 지역의 원주민들은 이러한 옥수수의 단점을 인식하여 토질의 영양분을 보충하는 호박, 땅콩과 함께 심어서 옥수수를 재배하는 등, 지력 소모를 방지했다.] 이는 어찌보면 당연하기도 했다. 또한, 마야 문명 후반기에 북부지역이 과도하게 성장하면서 산림을 벌채하고 건축물에 사용할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화전(농업)|화전]]'''(火田)을 만든 것이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유카탄 반도의 생태계는 그만한 인구를 버텨낼 정도로 강인한 생태계가 되지 못했다. 숲이 벌목과 화전으로 사라지자, 주요 초식 동물들은 순식간에 멸종하여 [[사냥]]으로도 지탱할 수 없었다. 결정적으로 멕시코 쪽의 군사 개입이 마지막 숨통을 끊었으니, 이는 막무가내식 개발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스터 섬]]에서도 유사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위의 농법에 대한 설명은 유카탄 반도 북부의 도시들에는 비교적 잘 들어맞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렝케 등의 도시에는 해당하지 않았다. 현재 마야인들의 농법은 화전을 기본으로 하고 북부 해안 가까이 있는 도시들에서는 당시에도 화전을 바탕으로 한 것 같지만, 남쪽의 티칼이나 팔렝케 등에서는 화전 대신, 세밀하게 짜인 [[수로]]를 이용해서 농사를 지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수로를 이용해서 물을 공급할 뿐만 아니라 수로 위에 자라는 [[수초]]들을 땅에 뿌려서 비료 겸 뿌리를 보호하는 용도로 사용했으므로 화전 방식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참고로 마야 문명에서는 물이 권력의 상징인데, 수로를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국가의 기본적인 역할이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멸망을 부추긴 것으로 간주하는 또 다른 이유는 지배층이 지나치게 전쟁에만 골몰했다는 점이다. 마야의 전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규모가 커지고 파괴적으로 변해서 여러 번성하던 도시들이 전쟁으로 멸망했다. 말기로 가면 마야 문명의 기록에 다른 도시를 파괴했다는 표현이 종종 등장하며, 실제로 여러 도시의 역사가 끊어졌다. 여기에 과도한 개발 등으로 인한 문제가 계속 심각해지는데도 전쟁과 인신 공양에만 열을 올리는 지배층에 대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도시를 뒤집어엎었다는 것이다. 농민들의 대규모 반란, 민란에 대한 분명한 근거는 없지만, 도시들이 멸망한 후에도 농민들은 수백 년 이상 도시 주변에서 계속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정황 증거로 제시된다. 16세기 스페인인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 제국]]에 괴멸적인 피해를 준 [[천연두]]는 마야에도 마지막 숨통을 틀어막는 수준의 피해를 줬다. 열대우림 지역에 잔존한 마야의 세력은 계속해서 저항했지만, 스페인군의 진격에 큰 타격을 줄 수는 없었다. 1531년 후기 마야의 중심지였던 [[치첸 이트사]]가 함락당했을 때 금방 되찾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나, 스페인의 침략은 이미 막을 수 없었다. 여담으로 당시 스페인인들이 더 거대했던 아즈텍이나 [[잉카 제국]]을 정복하는 것보다 이 마야를 정벌하는 쪽이 더 오래 걸렸는데[* 물론, 현지 원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스페인의 정벌이 실패하여 어느 정도의 자치를 허용받고 불완전한 상태에서 지금의 칠레와 아르헨티나 등 남미 중남부 지역을 식민지화했던 [[마푸체]]보다는 성공한 편이다. 사실, 중남미에는 마푸체 외에도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족이나 온두라스의 렌카족, 페루의 잉카 잔존 세력들 같이 스페인의 식민 침략에 대항하던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이 없진 않았는데 결국 이들은 모두 오랫동안 저항을 지속하지 못하고 스페인군에 의해서 진압, 정복되었다. 하지만 잉카 잔존 세력들의 경우, 40년 넘게 스페인군에게 항거하는 저항이 이어졌었다.], 역설적으로 이는 마야인들의 문명은 이미 붕괴한 상태라 중앙 정부가 부재하여 쪼개진 세력을 하나하나 점령해야 했고, 경제 구조 자체가 박살나서 마야인들은 [[금]]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던지라 대체로 [[콩키스타도르]]들의 관심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론이 각자 하나씩 있는데 먼저 농경의 경우에는 현대의 화전처럼 대규모 화전으로 생태계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면 모를까, 마야 전성기의 인구를 생각하더라도 넓은 열대우림에 비하면 농경지는 아주 적은 비율이었다. 마구잡이식 개발로 자멸할 정도는 아니었던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